[경상시론] 완장(腕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울산변호사회 작성일18-09-17 15:48 조회3,65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 신면주 울산변호사회 회장
크든 작든 자리와 권력이 주어졌다는건
근신·봉사하여 사람들 이롭게하라는 것
새 완장 등장을 개혁으로 착각해선 안돼
얼마 전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잘생긴 준마와 같은 손흥민 선수가 주장 완장을 차고 일본 진영을 마음껏 유린하며 승리하는 것을 보니 완장 찬 일본 순사가 우리 백성들을 탄압하는 장면이 오버랩되어 묘한 복수심의 희열을 만끽했다. 완장은 일제 강점기시절 일본 순사로부터 시작돼 한국전쟁 때 인민군과 그 부역자들이, 5·16 이후에는 혁명군이 완장을 차고 등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의 붉은 완장이야말로 이념 지향적인 특권으로 국민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완장은 마을이장, 민방위 공무원, 학교 선도부 등에 일상화 돼 있었지만 지금은 완장이라는 물건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아직도 완장의 흔적만은 곳곳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완장문화라는 말이 낯설지가 않다. 작금의 ‘갑질논란’ ‘미투논란’ ‘국정농단’ ‘사법농단’ ‘낙하산 인사’ 등의 밑바닥에는 권력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도구로 보는 완장문화가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잘 형상화 하고 있다. 최사장은 동네 저수지의 사용권을 얻어서 그 관리를 동네 건달 임종술에게 맡긴다. 임종술은 감독이라고 새겨진 완장을 차고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오늘부터 이게 다 내 저수지여. 내 손안에 있단 말이여. 이게 다 내 땅이나 마찬가지여. 내 땅이란 말이여. 누구도 넘보지 못할 내 땅이란 말이여”라고 독백을 한다. 단순히 저수지 관리권만 위임 받았음에도 완장을 차고 나니 권력의 사유화가 그의 의식 속에 맹렬히 싹트게 되는 것이다. 임종술은 저수지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은 가만 놔두질 않았다. 심지어 자기를 고용한 최사장 일행이 낚시하러 온 것까지도 가로막고 나섰다. 권력을 쥐어 준 국민에게도 대드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퇴임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임종술을 야단친다. “우리나라 전통에는 완장이라 것이 없었고, 일본놈의 찌끄레기이다. 우리나라에 완장 비슷한 것은 상장(喪章)이다. 부모상을 당한 자식들이 부모를 떠나보낸 죄인이라는 표시로 부정한 것을 더 멀리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표시로이다. 더 조심하고 근신하여야 한다는 표시가 상장이라는 것이다”라고 타이르지만 임종술 귀에는 마이동풍으로 행패는 계속된다. 권력에 도취한 나머지 현자들의 조언에도 귀를 닫는 독단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결국 종술은 저수지 물을 빼야 한다는 수리조합원과 경찰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다 쫓기는 신세가 되자 술집 작부 부월이와 완장을 저수지에 내던지고 야반도주하게 된다. 부월은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우리 둘이 힘만 합친다면 자기는 앞으로 진짜배기 완장도 찰 수 있단 말여!”라고 종술을 달랜다. 하수 받은 권력의 한계와 허망함을 한탄하며, 상층권력도 완장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거친 말로 풍자하고 있다. 임종술은 그간 자신의 행패를 마을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야반도주의 길을 택한다. 이는 잘못된 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은 내팽개치고, 잠적하거나 변명, 은거, 투신 등을 통해 더 큰 권력을 추구할 기회를 노리는 기득권자들의 세태를 그대로 형상화 하고 있다.
그렇다. 작든 크든 자리와 권력이 주어졌다는 것은 근신하고 봉사하여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라는 뜻이지, 호가호위하여 개인의 자리보전이나 탐욕을 추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완장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끝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사법처리 후 새로운 완장 부대들의 등장을 개혁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권력과 자리는 ‘완장(腕章)’이 아니라 ‘상장(喪章)’이라는 소설 속 선생님의 말씀대로 치열한 의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독했던 더위도 물러가고 한가위 연휴가 다가왔다. 연휴에는 차분히 소설 <완장>의 일독을 통해 현재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완장’을 차고 있는지 되돌아 볼일이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잘 형상화 하고 있다. 최사장은 동네 저수지의 사용권을 얻어서 그 관리를 동네 건달 임종술에게 맡긴다. 임종술은 감독이라고 새겨진 완장을 차고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오늘부터 이게 다 내 저수지여. 내 손안에 있단 말이여. 이게 다 내 땅이나 마찬가지여. 내 땅이란 말이여. 누구도 넘보지 못할 내 땅이란 말이여”라고 독백을 한다. 단순히 저수지 관리권만 위임 받았음에도 완장을 차고 나니 권력의 사유화가 그의 의식 속에 맹렬히 싹트게 되는 것이다. 임종술은 저수지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은 가만 놔두질 않았다. 심지어 자기를 고용한 최사장 일행이 낚시하러 온 것까지도 가로막고 나섰다. 권력을 쥐어 준 국민에게도 대드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퇴임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임종술을 야단친다. “우리나라 전통에는 완장이라 것이 없었고, 일본놈의 찌끄레기이다. 우리나라에 완장 비슷한 것은 상장(喪章)이다. 부모상을 당한 자식들이 부모를 떠나보낸 죄인이라는 표시로 부정한 것을 더 멀리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표시로이다. 더 조심하고 근신하여야 한다는 표시가 상장이라는 것이다”라고 타이르지만 임종술 귀에는 마이동풍으로 행패는 계속된다. 권력에 도취한 나머지 현자들의 조언에도 귀를 닫는 독단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결국 종술은 저수지 물을 빼야 한다는 수리조합원과 경찰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다 쫓기는 신세가 되자 술집 작부 부월이와 완장을 저수지에 내던지고 야반도주하게 된다. 부월은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우리 둘이 힘만 합친다면 자기는 앞으로 진짜배기 완장도 찰 수 있단 말여!”라고 종술을 달랜다. 하수 받은 권력의 한계와 허망함을 한탄하며, 상층권력도 완장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거친 말로 풍자하고 있다. 임종술은 그간 자신의 행패를 마을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야반도주의 길을 택한다. 이는 잘못된 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은 내팽개치고, 잠적하거나 변명, 은거, 투신 등을 통해 더 큰 권력을 추구할 기회를 노리는 기득권자들의 세태를 그대로 형상화 하고 있다.
그렇다. 작든 크든 자리와 권력이 주어졌다는 것은 근신하고 봉사하여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라는 뜻이지, 호가호위하여 개인의 자리보전이나 탐욕을 추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완장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끝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사법처리 후 새로운 완장 부대들의 등장을 개혁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권력과 자리는 ‘완장(腕章)’이 아니라 ‘상장(喪章)’이라는 소설 속 선생님의 말씀대로 치열한 의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독했던 더위도 물러가고 한가위 연휴가 다가왔다. 연휴에는 차분히 소설 <완장>의 일독을 통해 현재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완장’을 차고 있는지 되돌아 볼일이다.
<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